Saturday, May 23, 2020

삶에 대한 방황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What's on your mind?" 라고 쓰인 문구가 나를 바라보며 뭔가 적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한글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라고 표시될 것이다. 나는 하루에도 많은 생각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했다.

거의 반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나는 왜 태어났나?" 와 같은 질문을 하며 지냈다. 아직도 나의 창조 의미를 깨닫기 위해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탈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너무나 힘들 삶의 현실에 좌절하여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하지 못했다. 회사 생활을 할 때는 그저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에 회사와 집을 왔다 갔다 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해야 했다. 그 하나의 생각을 붙잡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실행했어야 했다. 치열한 고민이 없는 생각은 걱정과 자존감을 떨어뜨릴 뿐이었다.

많은 작가가 글을 "머리나 가슴이 아닌 엉덩이로 써야 한다"로 얘기하고, 대가를 일군 장인들도 한 분야에서 수십년을 연마한다. 그런데 나는 왜 하나에 진득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까?

작고하신 작가 구본형 선생이 말한 "자신의 욕망을 따른다"의 의미를 좀 더 일찍 알고 실천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든다. 이 '욕망'이란 것은 의식주와 색욕 같은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가 아닌, 매슬로가 말한 '자아실현(self-actualization)' 욕구나 '자아초월(Transcendence)' 욕구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생리, 안전, 애정·소속, 존경의 하위 단계 욕구를 추구하기에도 너무 힘든 시절을 보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에 바빴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가야 했으니 당연했었다고 위안을 할 수도 있겠다. 정말 그런가?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걸작을 남긴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상위 욕구를 실현한 셈이다. 그 비결은 안과 밖의 생각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감자가 수용소 밖에서만 희망을 보고, 안에서는 절망을 느꼈지만,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정제되고 계획된 시간으로 채웠다. 플랭클은 본인의 업이었던 정신과 의사의 활동을 대입시켰다. 바로 사람들을 '관찰'을 한 것이다. 이 일상의 행동이 그를 살리고 매슬로의 최상위 욕구 단계도 실현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도 잡다한 생각이 아닌 하나의 '실천' 강령이다. 나한테는 그것이 '쓰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되어 모든 사건을 바라보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 오히려 나쁜 사건에서 더 쓸거리가 많아진다. 삶에 대한 방황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기록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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